posted by Dr.Arale 2020. 5. 8. 19:59

접종을 생각하면 항상, 울음, 두려움, 식은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같은것들이 있다.  사람들에겐 어쩌면 상징적인 이 말들은 내게는 말그대로의 그것이다. 접종을 위한 예진을 하면 아이의 심장은 방망이질을 한다. 옷위로 박동이 느껴지는 정도일때도 있다. 손엔 식은땀이 가득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운다. 그리고 주사를 맞으면 맞는데로 더 운다. 

지금이야, 예방접종이라는 것이 안전하고, 지난 100여년의 성과로 전염성 질환을 감소시켰고, 사회적 비용을 감소하였으며, 건강한 삶을 약속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증명되어 그것을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전만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사람들을 계몽하고 계도하여 이것이 옳다고 설명한들, 당장 건강한 사람에게 침습적 시술을 하고 (면역반응때문에) 수일간 열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게 당연하다. 그리고 하다못해 어떤 병이 돈다해도 그것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작은 생명체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는 개념도 매우 근대적이므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고, 그 보이지 않는 것에는 신의 영역도 존재했으리라. 

하다못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스토리 텔링으로서의 병균이 기생충이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변화가 보이는데, 그것의 원인은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눈에 보이는 수준의 기생충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예방접종의 시작은, 그것이 아무리 혁신적인 방법의 예방책이라해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아이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현대의학과 철학의 기준하여, 본인에 동의 없이 침습적인 행위를 전 국가적으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은 멈출수가 없다. 이것은 작금의 코로나19 사태에 비추어 사회적 건강과 안녕을 위해 개인의 위치정보와 건강 정보를 정부가 소유하여도 되는가와 같은 아주 첨예한 논란에 맞닿아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것인가, 사회의 것인가.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기 위해, 사회에 소속된 인간으로서 다른사람에게 보호받고, 보호하기 위해 예방접종을 맞아야한다. 하지만, 한 아이는 사회구성원이기 이전에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이고,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주사를 맞는다는게,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는 예방접종을 쉬고있는 지난 1년 5개월간에도 머릿속에서 지속되었다. 

그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무엇으로 자라나는가로 귀결될지 모르겠다. 

 마치 공교육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위한 교육인가, 사회를 세우는 자로서의 인간을 위한 교육인가에서 맥락이 다른것과 같다. 그저 시스템에 순응하도록 하는 인간을 배출하는 교육은 비판을 멈추게하고, 생각을 더디게한다. 그리고 단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하도록 한다. 사회를 개척하고 새로 새우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하게 하는 교육은 생각하게하고, 나아질 것을 위해 참을 수 있도록 교육한다. 이점에서 백신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기에 양쪽 극단에 선 부모들은 모두 안티백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나치게 진보적이거나, 지나치게 우파적인 사상을 가진이들은 백신을 믿지 않는다. 

Eula Biss의 면역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는 이와같은 나의 생각을 이렇게 부드럽게 비틀고 있다. 

1900년대만 해도 천연두나, 홍역은 그저 가난한 이민자들의 병이었다. 병이 유행하면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백인 유지들을 위해 유색인종들은 소외된 지역에서 사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접종을 강제당했다. 같은 현상이 영국에서도 발생했다. 그들의 자녀에게 접종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 여러 불이익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자유를 노예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고통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고통이 더 가혹한 것임을 강조하는데 노예제도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여전히 기득권들은 백신을 맞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그들은 질병에 걸려도 빠르게 병원을 갈 수 있고, 일을 못한다고해서 직장을 잃지도 않을 뿐더러 좋은 치료환경으로 인해 잘 치료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백신을 맞을 수 없거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미처 완료하지 못한 백신으로 약해진 고리가 된 이웃은 그렇지 않다. 단 한번의 질병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저자는 과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기득권의 건강을 위해 강제로 접종하였던 것과 반대로, 이제 오히려 그들을 위해 모두가 접종해야한다고, 말그대로 몸을 통해 실현되는 공공 건강의 이득이 우리 모두가 나누려면, 조금 더 여유있는 이웃이 접종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투 그대로 그것은 아름답고 부드럽고 매우 권유적이었지만, 내가 쓰고나니 이상한데? 음....

적어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인구들은,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후에 발생할 고통과 고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고통과 소비에 동참하지만, 그래 적어도 그것들로 인해 더 깊히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예비할 여유조차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같은 공기를 숨쉬는 사람들이라면 내 면역을 나누는 것으로 함께 건강을 책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난 인간의 몸의 자기 결정권을 소아가 아닌 부모나 다른 성인이 행사 하는 것에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예방접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Dr.Arale 2019. 6. 6. 13:40

블로그를 만든 중요한 이유증에 하나가 예방접종 및 소아 건강에 관련된 논문을 리뷰해보고 싶어서였다.  

워낙 아는게 없어서 매우 기초적인 것부터 살펴보고 있던중 접종 실패에 관련된 논문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특히 홍역이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및 세계 각국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많이 나오고 있다.  혹역은 접종율이 95%이상 요구되는 전염율이 매우 높은 질병으로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지만 심각한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접종율을 매우 높게 유지해야하는 질병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지금 이게 어마어마하게 돌고 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9270.html 

요즘 2-3개의 논문을 읽고 하나라도 한번 끝내보려고 노력 중인데 

보고 있는 논문 ↓(몇개더있는데 안적음)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815604/pdf/AJPH.2015.302952.pdf

https://synapse.koreamed.org/Synapse/Data/PDFData/1086IC/ic-40-14.pdf 

공공정책으로서의 예방접종을 찾다가 우연히 예방접종과 윤리에 대해 다루는 논문을 보게 되고 만것이다.  이전에 찾았던 접종 실패와 접종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한 논문은 많이 보았는데 (그중 공화당 지지율과 접종율을 연구한 논문도 있었음!!!!).  중립적으로 접종에 반대하는 부모들과 어떤 타협을 거쳐 공공 의료를 완성할수 있는지 논의하는 논문은 처음 보아서 흥미롭게 보고 있는 중이다. 

첫장을 보는날부터 "이거 공 교육이랑 똑같은데?"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어서 몇자 적어보려고 한다. 

공교육은 산업혁명이후 국민의 질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문장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당시의 비교적 많은 진보적인 사상들이 지금은 꼰대의 영역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는데 

기존 신분재사회에서는 소수 권력자들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민중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가난하고 배운것이 없는 다수중 한명의 민중의 행복의 몫을 부유한 권력자의 그것과 동일한 선상으로 올렸다는 면에서 매우 파격적인 사상이었다.

공교육, 인권, 아동보호와 같은 생각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천천히 확산되고 정착되어왔는데 

(이 종목이 바로 아동의 인권과 밀접한 부분이기에 나는 이부분만을 언급하겠다.) 

사실 불과 백년전만해도 아이는 작은 어른에 불과했고 지금도 지구상 일부 나라들은 덩치가 작은 아이들을 이용해 작은 탄광에서 채굴을 시키거나 덩치에 비해 과도한 육체노동을 시키는등 "아동"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혹은 아동임에도 불구하게 발생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인권탄압을 볼수 있다.  여아에 대한 착취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는 남성과 여성,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이 달라졌다. 

예를들어 여성에게는 남성이 밖에서 충분히 착취당할 수 있도록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사를 분리하였고 그것을 여성의 몫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며, 그래서 거기에만 매달려야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이일은 전통적인 일이 아니다!)

아이는 미래의 노동자 국민으로서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공교육 대부분은 대중에게 선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문맹이 줄어들고,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모두의 잠재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 주의를 강화하고 비판적 시민이 아닌 국가의 피 지배적 위치에서의 대중을 위했던 국가주의 시대의 공교육은 맹목적인 국민을 생산했다.

우리는 돌이켜보며 광기를 보지만, 당시 독일이나 기타 국가주의/민족주의 국가들에서의 민족우월성에 대한 교육은 지금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무서운 것이다. 한 사람의 평생의 가치관을 좌지우지 하게 될 무서운 무기인것이다. )

이런 국가의 국민 통제로서의 공교육이, 건강을 통제한다는 목적에서의 예방접종과의 유사성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논문을 읽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려지고 2페이지 읽고 다른 몇개의 글을 더 읽은 후 나는 이글을 쓰고 있다. 

국가는 어디까지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이전의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영원한 조국이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다.어떤 사회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 다르기에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신세계로 떠난다.그 신세계는 적절한 간섭을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인가.

한국에서 소아과에 근무하는 기간동안 매달 1000건이 넘는 예방접종을 했다. 하루 3번 이상 예방접종약을 주사했다는 뜻이다. 6개월도 안된 아기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사를 맞는다. 운다. 부모는 달랜다. 열이난다. 주사부위에 발적이 생긴다.하지만 그 접종이 그들을 모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국가가 지정한 몇개의 위험한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다. 

물론 국가는 임의로 질병을 정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인류를 괴롭혀온 많은 전염병에대한 인류 공통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로 인류가 공통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국제 기준으로 정해져있다.그것은 공공의 선이다. 내가 맞고 내가 안걸리는 것도 있지만, 모두 다 같이 맞으면 혹시 못맞을수 있는 사람도 안전하게 지켜줄수 있다.

이것은 매우 공동체 주의적인 선언이다.아직 하나의 완성되지 않은 개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면역을 담당하기 위해 주사를 맞는다. 그것이 다소 침습적이라 하더라도 내 개인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보장해줌과 동시에 내가 공동체 내에서 일부 책임을 담당하고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기본조건으로서의 면역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생물학적인 책임이다. 마치, 글을 알고 세금을 낼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여기에서 인간을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도구로서 보는 시각이 문제라면 그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자본주의 노동자, 미래의 세금 낼 사람 

그러나, 아직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나이의 한 개인에게 국가가 무언가를 임의로 한다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법적 대리인으로서의 부모도 국가만큼이나 아이에 대해서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때가 있다. 낳았다고 다 부모는 아니니까. 예방접종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그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미루기로 결정하는 것조차도 주제넘는일 처럼 느껴진다. 아기의 미래를 미리 정하는 부모의 오만처럼 말이다.  

신실한 법적 대리인으로서의 보호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보호자들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일년에 한 두명, 십만명당 한명 발생할랑 말랑한 일을 설명해주는 의사는 많지 않고, 설사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내가 운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은 여전히 유효한 명제인가?

주사를 맞기 위해 오며가는 노력과, 주사를 맞는 공포의 경험과, 주사를 맞은 부위의 불편함, 주사를 맞은 이후의 발열과 그에 따른 부모의 노력, 주사를 놓기 위해 애쓰는 의사의 노력과 그것을 지속하고 때로는 더 증진 시키기위해 국가의 각기관이 행하는 노력과 유지는 한명한명에게 발생하는 위험한 질병이 휩쓸고 지나가서 발생하는 (상대적으로)소수의 개인들이 겪는 불편 (혹은 불행 혹은 죽음)과 비교할때 전체의 합이 충분히 작은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성에 대해 걱정하는 개인은, 그래서 거부하고 심지어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일부의 대중은 어리석거나 부도덕한가? 

(네, 부도덕하고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에 언급한 질병이 편만해져서 발생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개인들의 불행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매우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 자체를 미개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양한 시민들의 다양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매우 편협한 생각이기에, 좀더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1등부터 100등까지 분포를 만들고 양끝의 5%에게 비정상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현대 의학은 5%이상의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정하게 대해왔는지 돌이켜본다. 그 틀안에서만 정상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어도 매도 하지 않는 생각의 방식이 퍼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다양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통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처럼 국가 중앙의 체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는 곧 분자화 되고 미분화 될테니...

1:1까진 아니어도 좀더 세분화되고 개인화된 접종 스케쥴이나 건강 관리법이 나타나길.. 그래서 

그 시대에 맞는 더 세련되고 충분히 효과가 있는 예방접종 방법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결국 공공선이라는 이름의 예방접종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모달리티, 도구로서 비판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덜찌르고, 덜아프고, 병원에 덜 다니고, 부작용도 덜하고, 만능으로 막 다 치료해주고...

예쁜 주사로 맞으면 덜아프단 말도 있다고 하니..예쁜 주사기 만들어주세요!

결론 : 영화에 나오는것처럼 별로 안아프고 한방에 맞고 막 그런거 어디 없나.  나도 아기들에게 주사 찌르는거 매우 미안하다고.ㅠㅠ

 

출처 구글 : Futuristic syringe라고 검색하면 구글에 나오는 것. 뭐야 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