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종을 생각하면 항상, 울음, 두려움, 식은땀,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같은것들이 있다. 사람들에겐 어쩌면 상징적인 이 말들은 내게는 말그대로의 그것이다. 접종을 위한 예진을 하면 아이의 심장은 방망이질을 한다. 옷위로 박동이 느껴지는 정도일때도 있다. 손엔 식은땀이 가득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나를 보자마자 운다. 그리고 주사를 맞으면 맞는데로 더 운다.
지금이야, 예방접종이라는 것이 안전하고, 지난 100여년의 성과로 전염성 질환을 감소시켰고, 사회적 비용을 감소하였으며, 건강한 삶을 약속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증명되어 그것을 설명할 필요조차도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전만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사람들을 계몽하고 계도하여 이것이 옳다고 설명한들, 당장 건강한 사람에게 침습적 시술을 하고 (면역반응때문에) 수일간 열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여기는게 당연하다. 그리고 하다못해 어떤 병이 돈다해도 그것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작은 생명체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라는 개념도 매우 근대적이므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고, 그 보이지 않는 것에는 신의 영역도 존재했으리라.
하다못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스토리 텔링으로서의 병균이 기생충이라는 것 자체가 그것을 의미한다. 분명한 변화가 보이는데, 그것의 원인은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나마 눈에 보이는 수준의 기생충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예방접종의 시작은, 그것이 아무리 혁신적인 방법의 예방책이라해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아이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현대의학과 철학의 기준하여, 본인에 동의 없이 침습적인 행위를 전 국가적으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은 멈출수가 없다. 이것은 작금의 코로나19 사태에 비추어 사회적 건강과 안녕을 위해 개인의 위치정보와 건강 정보를 정부가 소유하여도 되는가와 같은 아주 첨예한 논란에 맞닿아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것인가, 사회의 것인가.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기 위해, 사회에 소속된 인간으로서 다른사람에게 보호받고, 보호하기 위해 예방접종을 맞아야한다. 하지만, 한 아이는 사회구성원이기 이전에 하나의 개체로서의 인간이고,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에 주사를 맞는다는게,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는 예방접종을 쉬고있는 지난 1년 5개월간에도 머릿속에서 지속되었다.
그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무엇으로 자라나는가로 귀결될지 모르겠다.
마치 공교육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위한 교육인가, 사회를 세우는 자로서의 인간을 위한 교육인가에서 맥락이 다른것과 같다. 그저 시스템에 순응하도록 하는 인간을 배출하는 교육은 비판을 멈추게하고, 생각을 더디게한다. 그리고 단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하도록 한다. 사회를 개척하고 새로 새우고, 올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하게 하는 교육은 생각하게하고, 나아질 것을 위해 참을 수 있도록 교육한다. 이점에서 백신은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기에 양쪽 극단에 선 부모들은 모두 안티백서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나치게 진보적이거나, 지나치게 우파적인 사상을 가진이들은 백신을 믿지 않는다.
Eula Biss의 면역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는 이와같은 나의 생각을 이렇게 부드럽게 비틀고 있다.
1900년대만 해도 천연두나, 홍역은 그저 가난한 이민자들의 병이었다. 병이 유행하면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백인 유지들을 위해 유색인종들은 소외된 지역에서 사는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접종을 강제당했다. 같은 현상이 영국에서도 발생했다. 그들의 자녀에게 접종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 여러 불이익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자유를 노예들의 그것과 비교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고통에 대해서 논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고통이 더 가혹한 것임을 강조하는데 노예제도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여전히 기득권들은 백신을 맞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그들은 질병에 걸려도 빠르게 병원을 갈 수 있고, 일을 못한다고해서 직장을 잃지도 않을 뿐더러 좋은 치료환경으로 인해 잘 치료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백신을 맞을 수 없거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미처 완료하지 못한 백신으로 약해진 고리가 된 이웃은 그렇지 않다. 단 한번의 질병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저자는 과거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기득권의 건강을 위해 강제로 접종하였던 것과 반대로, 이제 오히려 그들을 위해 모두가 접종해야한다고, 말그대로 몸을 통해 실현되는 공공 건강의 이득이 우리 모두가 나누려면, 조금 더 여유있는 이웃이 접종해야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투 그대로 그것은 아름답고 부드럽고 매우 권유적이었지만, 내가 쓰고나니 이상한데? 음....
적어도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인구들은,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 후에 발생할 고통과 고난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고통과 소비에 동참하지만, 그래 적어도 그것들로 인해 더 깊히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예비할 여유조차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같은 공기를 숨쉬는 사람들이라면 내 면역을 나누는 것으로 함께 건강을 책임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난 인간의 몸의 자기 결정권을 소아가 아닌 부모나 다른 성인이 행사 하는 것에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비단 예방접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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