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꽤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늘 답을 얻는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늘 답이 있는 것 처럼 보였을지 모르겠다.
누가 묻기도 전에 난 이렇게 살거야 하고 말하고 다녔으니
전문의를 따기전엔 네덜란드에 가서 살거라 하도 말하고 다녔더니만, 베트남에 있는동안 수년만에 연락온 후배가 외국이라니까 네덜란드냐고 물었다.
물론, 그 지독한 외국병은 베트남 + 역병으로 어느정도 치료가 되었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낯선 것이 그립다.
작년부터는 생각지도 못한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심리라는 것이 사람을 탐구하는 것이기에, 그 배경을 이해하려고 철학도 찾아보았다. 공부라고 하기엔 겉핧기 식이지만 제법 학자들의 이름도 꿰고 이론의 이름도 외는 정도가 되었다.
자폐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인간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자폐증이란 증상을 기술한 의사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고기능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이들의 고백을 보면 그들의 세상은 우리와 너무 다르다.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는 부정할 수 없노라고.
후설은 현상학으로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 당하는 것과 관찰하는 것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마치, 슈레딩거의 고양이처럼 관찰하는 행위는 많은 것을 바꾼다고 이미, 과학이 알기 전에 인간들은 알고 있었다.
생각이라는 존재적 행위가, 관찰이라는 현상적 행위가 그리고 그 인식의 과정이라는 것이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감각에 기반한 것이니, 그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처리되느냐가 결국 우리를 어떻게 반응할 것이냐의 일차적 관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자폐스펙트럼 장애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중 하나는 감각통합의 문제이다. 가장 큰 특징중 하나인 특정 감각에 대한 반복적 추구가 진단 기준에 포함되어있다. 감각을 추구하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어떤 감각에는 크게 반응하고 어떤 감각에는 둔하게 반응하며 어떤 감각들은 느꼈지만 머리에서 차단해버리는 것이 혹은 의미있는 정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어떤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의 인터뷰에서 엄마를 인식할때까지 자기만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이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그저 인간은 감각하는 동물에불과한 것인가? 과연 인간이란 것은 무엇이기에, 감각도 하고, 사고도 하며, 인식도 하고 그 안에서 운동도 하고 살아가야하는 것인가.
궁극적으로 적응적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그 적응적 삶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인가.
말도 안되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을 읽고 있다. 사람의 의식이 인식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안에서 다만 감각이 아니라, 예측하고, 예측이 맞고 틀리는지를 반성하며 다시 예측하는 반복되는 시스템 안에서 나라는 경계를 세워간다고 말한다. 즉, 나의 내부와 외부는 다르다고 말하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르게 판단하여 적응하도록 하는 것이 뇌가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의식 수준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대부분 무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난다. 중요한건 내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내 신체는 그것을 안다는 것이다.
소마틱 바디라는 개념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내가 인식하는 만큼의 우주, 내가 감각하는 정도의 나, 그것이 나를 이룬다. 바렐라가 말하는 인간은 데카르트를 전면 부정하기에 좀 충격이었다. 바렐라는 우리는 느끼는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생각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
지금 마뚜라나를 읽고 있다. 마뚜라나는 개구리와 조류의 망막, 시신경 연구를 통해 망막이 느끼는 것 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시각을 완성해나간다고 말한다.
즉, 유기체는 매개체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그 안에서 영속성을 만들어간다.
우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수 있는 장기로 사물을 느끼면서 우리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대부분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물은 사실 그 세상의 본질이 아닐지 모른다. 그저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느끼니 그렇다고 아는 것일 수 있다.
사실 우주는 가시광선으로 보지 않으면 이런 모습이 아닐거다. 심지어 우리가 보는 우주 사진들도 몇십 몇백 광년 밖의 빛이며 이미 과거의 빛일 뿐인데, 여러 광선을 조합해서 사람들이 보기 좋게 만든 이미지일뿐이고, 그 은하들은 인간의 눈으로 한눈에 볼수도 없으니, 정말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이것이 맞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이렇다보니, 자기생성과 인지, 살아있음의 실현이라는 이 과학자들이 지은책은 대승불교를 전공하신 철학자가 번역하셨다.
이렇게나 멀리멀리 돌아 다시, 자폐증으로 돌아온다. 자폐스펙트럼 장애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체계는 불완전한 것이며, 악하고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떻게 이 아이들을 이해하고, 우리가 느끼는 것을 같이 느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통증의 역치도 높다는데, 그 세계 안에서는 행복하다는데, 굳이 아픔의 세계로 절망의 세상으로 데리고 나와야하는 걸까?
여기에서 다시 푸코를 만났다. 푸코의 발언은 아주 단순하다. 현대의학은 질병을 장기 기준으로 분류하였다. 인간 시스템이 아니라, 장기 중심으로 해부학적으로 접근하도록 바꾸었다. 장애의 정치학을 위하여의 낸시 J. 허시먼은 사회적 장애가 장애인이 장애를 겪게 만든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걷지 못하는 장애가 아니라, 계단이 있는 사회가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애인임을 알게 한다고 하였다. 장애라는 것의 정의는 사회마다 다르다. 절대적으로 의학적인 개념이 아니다. 어느사회가 어떤 사람들을 기능하지 못한다고 정의할 것이냐는 순전히 사회가 정하는 것이다. 장애의 역사 (김승섭 역)에서 미국의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은 다리가 하나 없어도, 말을 못해도,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인 소통이 안되어도 그 사회에서 기능을 한다면 소외 하지 않고 그것을 장애라고 보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의학은 사람을 소외시키는 것인가, 정의하는 것인가, 사회로 다시 불러오는 것인가.
만약, 발달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적응적인 삶을 살고, 독립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단 하나의 목표라면 ABA가 효과적일 수 있겠다. 그러나 유기체 내부에 삶의 풍성함을 주기 위한 것이 우리 중재와 치료의 목적이라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해야한다.
애초에 사회로 다시 불러온다는 그것은 사회에 적응시키는 것인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인가.
그래서 지금 기능의학을, 심리학을, 철학을, 인지과학을 배운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세포, 세상, 정신, 그리고 여러 장기에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 마음과 몸을 같이 보는 그런 진료말이다. 그 사람의 시간, 경험, 감정을 함께 보는 진료다. 마음이 어떻게 몸과 떨어져있으며, 과거가 현재를 이룬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리고 이 몸으로 미래를 살아갈 그 사람의 마음부터 달래는 것이 진료의 시작이 아닐리 없다.
근데, 너무 어렵다. 나는 지금 얽힌 실타래를 들고 있는데, 이게 그전과는 다르게 너무 크다.
나는 지구를 구하려는게 아니다. 그냥 내가 궁금한 것을 따라가고 있다. 앨리스처럼 작은 토끼굴에 들어갔는데 너무 큰 왕궁을 마주했다.
긿을 일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 칼세이건이 말했듯, 이 푸른점에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기쁨과 사랑이 살아가고 있다. 이 억겁의 세월속에서 찰나의 시간에 만난 우리들이, 짧은 인생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오늘 크리스토퍼 틴의 " Flocks a mile wide (1마일 너비의 새떼)"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매해 가는 수많은 철새들에 비하면 지금 내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에겐 따뜻한 집도 있고, 쉴 시간도 있다. 그래서 위로를 받고 오늘 한 걸음을 걷는다. 이 여행이 어떻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주 작은 불씨가 되어, 아이들을 돕게되면 좋겠다.
사랑하는 소설가 톨킨은
All that is gold does not glitter; Not all who wander are lost.
The old that is strong does not wither.
Deep roots are not reached by the frost.
라고 말했다.
모든 금이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헤메는 모든 이들이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강하여 오래된 것들은 시들지 않으며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는다.
나는 헤매고 있으나, 길을 잃지 않았기를, 깊은 뿌리가 되기를 하여, 시들지 않기를 바래본다.
이제 시작된 것 같은 이 모험에 끝내 길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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