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우리병원에 뇌졸중 온 전공의 샘들이 있었다. 박봉에 말도안되는 노동강도가 우리를 그렇게 내몰았다. 내 친구는 신생아과 전임의였는데 휴가받고 주말에 콜받아서 병원으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사망했다. 하지만, 우리중 어느누구도 산재는 받지 못했다.
소아과 원가 보전율이 70%라고 한다. 대학병원은 지역마다 신생아과에서 좋은 중환자실 센터를 만들고 싶어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신생아중환자실은 잘될수록 손해라는것을. 그럼에도 병원이 굴러가는 이유는 박봉 받으며 밤새고 애쓰는 전공의/전임의 선생님들 덕분이다.
나는 흙수저 출신이라 감히 대학병원에 남지 못했다. 그런 박봉과 시간을 쓰며 시간을 더 보내기엔 이미 졸업과 수련을 위해 사용한 사회적 비용과 실제적인 비용이 너무 많이 쌓였다. (빚이 있다는뜻)
초미숙아 학회에 간적이 있다. 주한미국인 자녀가 초미숙아로 출생해 삼성의료원에서 자랐고, 다행히 특별한 합병증 없이 잘 자랐다는 내용의 영상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미국이라면 절대 그렇게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그건 기술의 문제도 있겠지만, 절대적으로 병원비의 문제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젊은 의사들의 눈물과 땀이 아이들을 살린다. 그리고 그것은 수련이라는 미명하에 병원으로 흡수되고, 병원은 국민건강이라는 이름으로 심평원과 협의하며, 심평원은 건강 보험 공단의 제정 확보라는 이름으로 삭감을 감행한다.
매해 심평원이 병원에 지급하지 않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어떤 해에는 돈을 더달라는게 아니라 미지급분이라도 내놓으라고 시위할때도 있다.
아니, 내돈 내가 달라는데 그것도 보전율 70%밖에 안되는데 그나마도 못받는거다.
이 서사는 우리나라에 너무 흔하다. 열정페이를 강요하고, 돈을 더달라고하면 사직시키고, 그나마 받아야할 퇴직금이나 기타 급여를 떼먹는다.
그리고는 젊은 사람이 너무 건방지다느니, 돈만 밝힌다느니..
일이 급하고 중요하면, 그 사람에게 그 만큼 대우를 해주면 된다.
지금 전공의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은것은 그때문이다.
여태 우리가 값싼 보험료로 좋은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만좀 하자, 누군가를 갈아 넣어서 유지하는 시스템 , 우리나라에 그거 엄청 많잖아. 아프면 정당하게 쉬고, 내가 일한만큼 정당하게 받고, 할 말은 당당하게 하고. 그런 멋진 세상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턴/레지던트 선생님들은 학생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흔히 말하는 인턴 - 물론 누구도 무급으로 일하면 안되지만, 흔히 교육을 핑계삼아 막일을 시키는, 아직 자격을 받기 전의 누군가-가 아니다. 그들은 정식 의학교육을 마치고 개인으로서 의술을 시행할 수 있다고 나라에서 인정받은 의사다.
그 사람이 교육을 목적으로 4-5년을 그렇게 혹사해도 되는것은 어떤때에도 정당하지 않다.
물불 가리지 않고 국민건강을 위해 애쓰는 의사들을 돈만 아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태도다. 지금 의사들을 비난하는 분들은 부디 어떤 병도 안걸리셨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필수적인 그 약을 건보에서 적용해주지 않아 고통 받는 수많은 국민들과 그것때문에 분노하는 의사들의 불행을 당신은 몰랐으면 좋겠다. 그래야 지금 막연한 불만에 대한 후회가 없으실 듯 하다.
블로그를 만든 중요한 이유증에 하나가 예방접종 및 소아 건강에 관련된 논문을 리뷰해보고 싶어서였다.
워낙 아는게 없어서 매우 기초적인 것부터 살펴보고 있던중 접종 실패에 관련된 논문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특히 홍역이 한국 뿐 아니라 미국 및 세계 각국에서 돌고 있기 때문에 많이 나오고 있다. 혹역은 접종율이 95%이상 요구되는 전염율이 매우 높은 질병으로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지만 심각한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접종율을 매우 높게 유지해야하는 질병이다.
공공정책으로서의 예방접종을 찾다가 우연히 예방접종과 윤리에 대해 다루는 논문을 보게 되고 만것이다. 이전에 찾았던 접종 실패와 접종을 반대하는 움직임에 대한 논문은 많이 보았는데 (그중 공화당 지지율과 접종율을 연구한 논문도 있었음!!!!). 중립적으로 접종에 반대하는 부모들과 어떤 타협을 거쳐 공공 의료를 완성할수 있는지 논의하는 논문은 처음 보아서 흥미롭게 보고 있는 중이다.
첫장을 보는날부터 "이거 공 교육이랑 똑같은데?"라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어서 몇자 적어보려고 한다.
공교육은 산업혁명이후 국민의 질 향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문장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당시의 비교적 많은 진보적인 사상들이 지금은 꼰대의 영역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는 당시로선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는데
기존 신분재사회에서는 소수 권력자들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민중이 희생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리주의는 가난하고 배운것이 없는 다수중 한명의 민중의 행복의 몫을 부유한 권력자의 그것과 동일한 선상으로 올렸다는 면에서 매우 파격적인 사상이었다.
공교육, 인권, 아동보호와 같은 생각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천천히 확산되고 정착되어왔는데
(이 종목이 바로 아동의 인권과 밀접한 부분이기에 나는 이부분만을 언급하겠다.)
사실 불과 백년전만해도 아이는 작은 어른에 불과했고 지금도 지구상 일부 나라들은 덩치가 작은 아이들을 이용해 작은 탄광에서 채굴을 시키거나 덩치에 비해 과도한 육체노동을 시키는등 "아동"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혹은 아동임에도 불구하게 발생하는 여러가지 형태의 인권탄압을 볼수 있다. 여아에 대한 착취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는 남성과 여성,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이 달라졌다.
예를들어 여성에게는 남성이 밖에서 충분히 착취당할 수 있도록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사를 분리하였고 그것을 여성의 몫으로 넘겼다.
그리고 그것은 가치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며, 그래서 거기에만 매달려야한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이일은 전통적인 일이 아니다!)
아이는 미래의 노동자 국민으로서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공교육 대부분은 대중에게 선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문맹이 줄어들고, 신분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모두의 잠재적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가 주의를 강화하고 비판적 시민이 아닌 국가의 피 지배적 위치에서의 대중을 위했던 국가주의 시대의 공교육은 맹목적인 국민을 생산했다.
우리는 돌이켜보며 광기를 보지만, 당시 독일이나 기타 국가주의/민족주의 국가들에서의 민족우월성에 대한 교육은 지금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무서운 것이다. 한 사람의 평생의 가치관을 좌지우지 하게 될 무서운 무기인것이다. )
이런 국가의 국민 통제로서의 공교육이, 건강을 통제한다는 목적에서의 예방접종과의 유사성에서 깊은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 논문을 읽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려지고 2페이지 읽고 다른 몇개의 글을 더 읽은 후 나는 이글을 쓰고 있다.
국가는 어디까지 국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
이전의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고, 영원한 조국이라는 것도 없어진지 오래다.어떤 사회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 다르기에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신세계로 떠난다.그 신세계는 적절한 간섭을 통해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는 것인가.
한국에서 소아과에 근무하는 기간동안 매달 1000건이 넘는 예방접종을 했다. 하루 3번 이상 예방접종약을 주사했다는 뜻이다. 6개월도 안된 아기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주사를 맞는다. 운다. 부모는 달랜다. 열이난다. 주사부위에 발적이 생긴다.하지만 그 접종이 그들을 모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것도 아니다.국가가 지정한 몇개의 위험한 질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다.
물론 국가는 임의로 질병을 정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인류를 괴롭혀온 많은 전염병에대한 인류 공통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로 인류가 공통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국제 기준으로 정해져있다.그것은 공공의 선이다. 내가 맞고 내가 안걸리는 것도 있지만, 모두 다 같이 맞으면 혹시 못맞을수 있는 사람도 안전하게 지켜줄수 있다.
이것은 매우 공동체 주의적인 선언이다.아직 하나의 완성되지 않은 개인은 태어남과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면역을 담당하기 위해 주사를 맞는다. 그것이 다소 침습적이라 하더라도 내 개인의 행복을 우선적으로 보장해줌과 동시에 내가 공동체 내에서 일부 책임을 담당하고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어떤 행위를 하기 위한 기본조건으로서의 면역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생물학적인 책임이다. 마치, 글을 알고 세금을 낼수 있는 직업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여기에서 인간을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도구로서 보는 시각이 문제라면 그 부분에 있어서도 매우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시민=자본주의 노동자, 미래의 세금 낼 사람
그러나, 아직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나이의 한 개인에게 국가가 무언가를 임의로 한다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법적 대리인으로서의 부모도 국가만큼이나 아이에 대해서는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때가 있다. 낳았다고 다 부모는 아니니까. 예방접종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그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미루기로 결정하는 것조차도 주제넘는일 처럼 느껴진다. 아기의 미래를 미리 정하는 부모의 오만처럼 말이다.
신실한 법적 대리인으로서의 보호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보호자들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일년에 한 두명, 십만명당 한명 발생할랑 말랑한 일을 설명해주는 의사는 많지 않고, 설사 발생한다 해도 그것은 내가 운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본다. "최대 다수 최대 행복"은 여전히 유효한 명제인가?
주사를 맞기 위해 오며가는 노력과, 주사를 맞는 공포의 경험과, 주사를 맞은 부위의 불편함, 주사를 맞은 이후의 발열과 그에 따른 부모의 노력, 주사를 놓기 위해 애쓰는 의사의 노력과 그것을 지속하고 때로는 더 증진 시키기위해 국가의 각기관이 행하는 노력과 유지는 한명한명에게 발생하는 위험한 질병이 휩쓸고 지나가서 발생하는 (상대적으로)소수의 개인들이 겪는 불편 (혹은 불행 혹은 죽음)과 비교할때 전체의 합이 충분히 작은지 묻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성에 대해 걱정하는 개인은, 그래서 거부하고 심지어 거짓 소문을 퍼트리는 일부의 대중은 어리석거나 부도덕한가?
(네, 부도덕하고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에 언급한 질병이 편만해져서 발생하는 상대적으로 소수인 개인들의 불행에 대한 책임에 대해 매우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 자체를 미개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양한 시민들의 다양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매우 편협한 생각이기에, 좀더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1등부터 100등까지 분포를 만들고 양끝의 5%에게 비정상이라고 부르게 만드는 현대 의학은 5%이상의 다양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정하게 대해왔는지 돌이켜본다. 그 틀안에서만 정상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품어도 매도 하지 않는 생각의 방식이 퍼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다양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접근을 통한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처럼 국가 중앙의 체계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는 곧 분자화 되고 미분화 될테니...
1:1까진 아니어도 좀더 세분화되고 개인화된 접종 스케쥴이나 건강 관리법이 나타나길.. 그래서
그 시대에 맞는 더 세련되고 충분히 효과가 있는 예방접종 방법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결국 공공선이라는 이름의 예방접종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모달리티, 도구로서 비판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덜찌르고, 덜아프고, 병원에 덜 다니고, 부작용도 덜하고, 만능으로 막 다 치료해주고...
예쁜 주사로 맞으면 덜아프단 말도 있다고 하니..예쁜 주사기 만들어주세요!
결론 : 영화에 나오는것처럼 별로 안아프고 한방에 맞고 막 그런거 어디 없나. 나도 아기들에게 주사 찌르는거 매우 미안하다고.ㅠㅠ
출처 구글 : Futuristic syringe라고 검색하면 구글에 나오는 것. 뭐야 총이야.